산지 유통인 “작업비·운송비도 못건져” 출하 포기 농민, 잔금 못받고 시장격리에도 참여 못해 손해만 서면계약서 작성의무 품목 배추·무 등으로 확대를
산지유통인과의 밭떼기거래에 참여했던 농가들이 계약 미이행으로 피해를 입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겨울배추 등 최근 채소 값이 크게 하락하면서 농가와 밭떼기거래 계약을 맺었던 산지유통인들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농산물 판매대금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등 해당 농가들의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겨울배추 주산지 농가와 농협 등에 따르면 올 들어 산지유통인이 농가와 밭떼기거래 계약을 맺은 후 이를 일방적으로 해지하거나 약정했던 출하일을 지키지 않는 등의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배추 가격이 폭락한 탓에 밭떼기거래 물량을 출하해도 작업비와 운송비 등을 건질 수 없다고 판단되자 산지유통인들이 출하 자체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란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배추농가 박철규씨(가명·전남 해남군 문내면)는 “지난해 10월쯤 산지유통인들이 마을에 찾아와 7~8명의 농가들이 밭떼기거래를 했는데, 이들 중 2명은 산지유통인이 아직도 배추를 뽑아가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다”며 “아마 배추 값이 계속 떨어지니까 산지유통인들이 그냥 포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내농협 관계자도 “농협과 계약하지 않고 산지유통인과 계약한 농민들 중 일부는 계약이 이행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며 “요즘 배추 값이 10㎏들이 한망에 2500원까지 떨어지자 산지유통인들이 도중에 발을 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제는 산지유통인들의 계약 미이행에 따른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보통 농가들이 밭떼기거래를 할 때는 파종단계에서 매매대금의 10% 정도만 계약금으로 받고 나머지 매매대금은 출하 시점에 받는다. 하지만 산지유통인들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농가들이 나머지 매매대금을 못 받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농가의 경우 계약을 맺을 때 서면계약서를 쓰지 않고 관행적으로 구두계약을 맺으면서 문제가 불거져도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선 지난해부터 밭떼기거래 계약시 서면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했지만, 현재 대상 품목이 양파와 양배추로 국한돼 있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산지유통인과 밭떼기거래를 한 농가들은 정부가 최저가격을 보상해주는 ‘시장격리’ 시책에도 참여할 수 없다. 해남 황산농협 관계자는 “산지유통인과 계약을 했던 농가들은 중도에 계약이 파기됐더라도 정부의 시장격리 대상에서는 제외된다”며 “그렇다고 밑지면서 시장에 출하할 수도 없다보니 해당 농가들은 배추를 밭에 방치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들의 손해만 불어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산지유통인들이 농작물을 수확해 가더라도 약정했던 출하일보다 늦게 가져가 농가들이 차기 작형 농작물 재배에 차질을 빚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농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정한 서면계약서 작성 의무 품목을 현행 양파·양배추에서 배추·무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정부가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 ‘표준계약서’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농가들의 사용을 더욱 늘려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표준계약서의 경우 밭떼기거래시 계약금을 30% 이상 지급하도록 해 계약해지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위약금으로 총매매대금을 보상토록 하는 등 농가 보호장치가 강화돼 있다.
이와 함께 농가와 산지유통인 사이의 분쟁을 다루고 조정할 전문기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고용철 순천향대 교수는 “현재는 밭떼기거래를 놓고 농가와 산지유통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법정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농가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며 “법정에 가기에 앞서 제3의 공정한 기구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도록(가칭) ‘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