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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시장 개방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는 “각계 의견을 수렴해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한다. 그렇지만 정부의 무게 중심은 개방(관세화)쪽으로 기울어 가는 분위기다. 농민단체·학계 일각에서는 의무수입량 증량 없이 관세화 유예를 계속할 수 있다는 ‘현상유지론’을 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개방불가피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쌀시장을 개방해도 우리 쌀산업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을까? 전문가들이 제시한 관세화의 전제 조건을 짚어본다.
◆고율관세 확보해야=관세화란 일정한 관세를 물리면서 시장을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쌀시장이 관세화로 전환되면 누구든 관세를 내고 외국쌀을 수입할 수 있게 된다. 관세화의 득실은 ‘관세가 붙은 외국쌀이 얼마나 수입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외국쌀이 발을 붙이기 어려운 수준으로 관세를 높게 설정하면 개방 피해를 비켜갈 수 있다. 반대로 수입쌀이 국내산 쌀보다 싸게 판매될 정도로 관세가 낮게 설정된다면 우리 쌀산업은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
관세는 국내외 가격 차이인 관세상당치(TE)를 기초로 산출한다. 정부는 우리 쌀 관세가 300~500% 사이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수준이면 미국의 중단립종 쌀 수입은 어렵다. 그렇지만 미국산의 40% 수준인 태국산 장립종 쌀은 비록 수요층이 넓지 않더라도 수입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22일 국제선물시장에서 미국쌀은 1t에 1088달러, 태국쌀은 400달러에 거래됐다. 태국쌀 가격을 원화로 환산하면 80㎏에 3만3000원쯤 된다. 부대비용을 제외한 반입 단가는 관세가 300%일 때 13만2000원, 500%면 19만8000원 수준이다. 태국쌀은 2008년 국제곡물가격이 폭등하기 전까지는 1t당 200달러대에서 거래됐다.
◆수입쌀 대북지원·해외원조 길 터야=올해 우리나라가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쌀은 40만8700t이다. 지난해 경기도 전체 생산량(40만7000t)을 웃도는 양이다. 내년 1월부터 관세화가 단행되더라도 이 물량을 매년 수입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물량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다. 쌀 10만t을 보관하려면 창고 임대료와 금융비용, 보관보험료 등으로 연간 300억원이 든다.
일본은 매년 관세화 유예 마지막 해의 의무수입량인 76만7000t을 저율관세할당(TRQ) 방식으로 수입한다(위 표 참조). 전량 국영무역을 통해 정부가 구입·관리한다. 주로 가공용으로 판매되며, 남은 쌀은 가축 사료나 해외원조로 쓰인다. 밥쌀용으로 사용된 양은 10% 정도다. 그나마 외국인 근로자용이다. 일본정부는 수입쌀은 물론 자국쌀까지 해외원조에 사용하면서 수급을 조절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수입쌀을 대북지원이나 해외원조에 활용한다면 수급조절이 한층 수월해질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2007년 우리나라는 북한에 쌀 250만t을 지원했다. 이 중 95만t이 외국쌀이다. 여기에는 최소시장접근(MMA) 방식으로 수입된 쌀이 단 한톨도 포함되지 못했다. 국내 창고에 수입쌀이 넘쳐났지만, 별도의 돈을 들여 외국쌀을 구입해 북한에 지원했던 것이다.
이는 대북지원과 해외원조가 막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쌀 관세화 관련 국제 논의에서 수입쌀의 다양한 활용권을 얻어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다른 품목 희생 없어야=쌀시장 개방 시기를 늦추려는 필리핀의 웨이버(일시적 의무면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것은 이해당사국들이 쌀 이외의 다른 농산물을 노리기 때문이다. 웨이버 협상에 참여한 9개국은 필리핀과의 개별협상에서 쇠고기 관세 인하, 동식물 위생·검역 기준(SPS) 완화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TE 검증 과정에서도 상대국들은 각종 통상 현안 해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2004년 정부는 관세화 연장 협상에 참여한 나라에 검역완화와 같은 부가합의를 해줬다(아래 표 참조). 쌀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캐나다·아르헨티나도 협상에 발을 담갔다가 전리품을 챙겼다.
중국이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벌이는 점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중국은 검역 관련 국제회의에서 “한국이 수입농축산물을 검역할 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불만을 제기해왔다. 동식물 수입 허용 여부를 국가 전체가 아닌 지역 단위로 판단하는 ‘지역화’도 중국의 오랜 요구 사항이다. 이밖에 동남아시아권은 열대과일, 남미권은 축산물 검역 완화를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TPP·FTA에서 쌀은 반드시 지켜야=정부는 쌀 관세화 문제는 FTA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는 별개 사안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TPP 관련 한·미 양자협상이나 한·중 FTA 협상에서 상대국들이 쌀 개방을 들고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게 농민단체와 학계 일부의 주장이다. 쌀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정치적·경제적 민감성을 뻔히 아는 상대국 입장에선 가장 유용한 쌀 카드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우리나라가 쌀 관세화를 선언하면 미국은 한국의 TPP 참여 조건으로 ‘쌀 개방 확대’란 비싼 입장료를 요구할 것”이라며 “TPP 회원국이면서 세계 1위의 쌀 수출국인 베트남도 가공용 시장을 겨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희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실장은 “정부가 농업계의 불안감을 잠재우려면 TPP·FTA에서 ‘반드시’ 쌀은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상영 기자 supply@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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