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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식량주권 확보를 위해 해외에 식량기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선배 교수의 말에 공감한 필자는 극동러시아 연해주 방문에 동행을 부탁했고, 전략적 부동항(不凍港)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우수리(雨水里)스크(스크-‘도시’를 뜻하는 러시아 형용접미사)에 도착했다. 연해주는 옛 발해(서기 698~926년) 땅으로 우리 민족이 진출한지 1000년이 넘는 곳이다. 2004년 방문 당시 연해주의 거의 모든 집단농장 및 농업생산기반시설이 붕괴돼 있어 러시아 정부는 외국의 농업투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환경과 곡물반입의 제도적 불확실성 때문에 동행한 진취적 선진농업인들 중에서도 선뜻 선조들이 개척했던 땅에서 농사를 지어 보겠다는 분은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자원 개발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돼 있었고 농업부문도 해외농업자원 및 식량주권 확보를 위해 해외에 식량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회적 동의가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정부는 해외농업 개발을 위한 보조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해외농업 개발의 정책목표 및 보조사업은 비상시 곡물반입을 목표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오랜 조정기간을 거친 뒤 본격적인 해외농업개발사업은 2013년 10월 ‘해외농업개발협력법’이 시행된 후에야 시작됐다. 2014년 6월 한국농어촌공사와 해외농업개발협회가 충북 충주에서 개최한 ‘해외농업개발 세미나’에는 500명이 넘는 농업인 및 투자자들이 참석했다. 농업인과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식품과 관련한 농기업과 일반기업, 투자자들이 대강당을 가득 메웠으며 연해주에 2만㏊ 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는 기업을 비롯해 해외농업 개발에 성공한 사례들이 소개됐다. 세미나장의 열기는 해외농업 개발에 대한 관심이 국내농업에 대한 투자나 관심에 못지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문제는 해외농업 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원제도가 아직 식량기지 확보라는 정책목표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공공부문 주도의 10년 전 정책목표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하는 해외농업 개발이 추진돼야 하며, 정책목표도 우리나라 농업인들이 해외에 활발히 진출할 수 있도록 이분화돼야 한다.
해외농업 개발의 주체는 공공부문(한국농어촌공사·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한국수출입은행 및 농식품모태펀드 등)과 민간부문(농업인·농업법인·식품회사 등 관련 농기업 및 일반 기업, 사모펀드를 비롯한 투자회사 등)으로 대별될 수 있으며, 각 주체들의 해외진출 목적과 영역은 크게 다르다. 따라서 공공부문은 원래 해외농업 개발의 공공적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식량주권 확보를 위한 현지 곡물생산기지 확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동시에 민간부문은 수익창출을 위해 자유롭게 작목선택과 사업구상을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즉 향후 해외농업 개발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투트랙(이분화) 전략 및 두 부문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해외식량기지를 건설하고 반입을 강제하기보다는 현지 곡물가격이 국제곡물가격보다 높다면 현지에서 판매하고 그 판매대금으로 더 저렴한 곡물을 반입하는 등의 유연한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만약 국제곡물가격이 진출국의 곡물가격보다 높은 경우에는 법으로 정했고 융자도 해 줬으니 싸게 도입하라면 법적으로야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부문에 무리한 요구라고 판단되므로 공공부문이 이를 감당해 줘야 한다. 해외농업개발협력법의 입법 전까지는 공공부문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으나 이제는 가능하게 됐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식량주권확보정책과 비대칭적 포화상태에 이른 한국 농업시장만 바라보지 않고 해외로 진출하려는 진취적 농업인과 농업 관련 사업자들에게 숨통을 틔워 주는 정책이 함께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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