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쌀을 뺀 자급률은 5% 정도에 불과하다. 식량이 부족하면 외국에서 사먹으면 된다는 경제논리가 곡물자급률을 이 수준까지 떨어뜨렸다. 최근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산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공산품 수출을 늘려 벌어들인 돈으로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서 먹는 게 효율적이란 게 비농업계의 주장이다. 이런 시각은 알게 모르게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식량이 갖는 경제·사회적 중요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게 농업 관련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식량 부족은 재앙=일반 상품은 공급이 부족하거나 가격이 급등할 때 소비를 미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식량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소비를 늦출 수 없는 특수성을 갖는다. 식량 수급이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안보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 곡물시장은 전체 생산량 가운데 교역량 비중이 15% 정도에 불과한 ‘얇은 시장(Thin Market)’이다. 특히 쌀은 교역량 비중이 4~5% 정도고, 그나마 우리의 주식인 단립종 쌀은 전체 쌀 교역량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얇은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조금만 변해도 가격이 요동친다. 2006년 하반기 지구 곳곳에서 기상이변으로 곡물 생산이 줄자 국제 곡물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에 바이오연료용 곡물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전 세계가 2년 동안 애그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았다. 2006년 6월부터 2008년 4월까지 밀·옥수수·콩의 국제 가격은 각각 86%, 125%, 123% 뛰었다. 특히 국제시장에서 거래량이 미미한 쌀은 232%나 올랐다.
주요 곡물을 해외 조달에 의존하는 선진국은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를 빼곤 없다. 유럽의 3대 선진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의 곡물자급률은 100%를 넘는다. 이들 국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경험한 식량난을 계기로 식량안보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국 농업의 보호·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또 ‘효율성’이라는 세속적 기준으로 농업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꺼린다.
◆식량은 국가안보의 핵심=식량 부족 사태는 정부나 국민이 잠깐만 방심하면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다. 1970년대에 쌀 자급을 이룬 우리나라도 식량 부족 위기를 몇차례 겪었다. 1980년 전국을 휩쓴 냉해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자 정부는 미국에 쌀 수출을 요청했다. 그러자 대형 곡물메이저인 코넬은 미국 쌀경작자협회(RGA)와 손잡고 시세보다 두배 이상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당시 국제곡물시장에서 전체 중립종 쌀 교역량은 230만t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224만t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코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은 스스로 농업을 포기했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 대표적인 사례다. 필리핀은 아시아 농업혁명의 전초기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3모작을 기반으로 쌀 생산을 늘려 국내 소비를 충당하고 수출까지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세계화 바람을 타고 농업 투자를 절반으로 줄였다. 쌀이 남아돌고 국제 쌀값도 안정세를 보이는데 굳이 농업에 투자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득세했다. 1995년 쌀값이 오르자 필리핀 정부는 쌀 수입을 결정했고, 수입량은 해마다 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6~2008년 애그플레이션 당시 국제 쌀값이 단숨에 3배나 올랐다. 그나마 팔겠다는 나라도 없었다. 급기야 필리핀에서는 쌀을 달라는 시위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카메룬·멕시코·인도네시아 등 30여개국에서 발생한 시위나, 2011년 초 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을 휩쓴 재스민혁명 역시 식량부족 문제에서 시작됐다.
◆부족 사태는 언제든 닥칠 수 있어=최근 국제 곡물가격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변동성은 언제든지 확대될 수 있다. 토지 제약으로 생산량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고, 잦은 기상이변으로 생산 요소의 불안정성도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개도국의 인구·소비 증가, 바이오연료용 수요 증가, 신흥국의 육류소비 증가는 2000년대 후반 같은 곡물 부족 사태가 조만간 재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10년 후 세계 식량 수요는 14% 증가하는 데 반해 기후 변화로 농업 생산량은 2%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세계은행도 기후변화 여파로 농작물 수확이 줄거나 자연재해·질병 등이 확산되면서 2030년까지 전 세계 빈곤층 인구가 1억명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1984년 48.7%에서 2014년에는 24%로 20년 새 절반이나 떨어졌다. 곡물의 4분의 3 이상을 외국에서 사다 먹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적인 곡물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배상건 농협 경제통상연구팀 차장은 “곡물을 수입해서 먹는 게 이득이라는 인식은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단순한 논리”라며 “기초식량을 해외에 의존하면 국제 곡물시장이 혼란할 때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