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 서울 도봉구 한 대형마트 쌀 판매코너. 주말인데도 쌀을 찾는 소비자들을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두시간 반 남짓을 지켜봤지만 매장에서 쌀을 구매한 고객은 다섯명에 불과했다.
쌀을 구매한 고객들이 쌀 판매코너에 머문 시간은 모두가 5분 이내였다. 쌀 판매코너에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원하는 쌀을 집어들었다. 경기산 브랜드쌀을 구매한 창5동에 거주하는 오미선씨(42)는 “매번 이 쌀을 사왔고 앞으로도 딱히 바꿀 계획이 없다”며 “값이나 품질에 큰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나머지 4명에게도 똑같이 구매한 쌀을 구입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향에서 생산한 쌀”이라거나 “한번 먹어본 뒤 반복적으로 구입하고 있다”는 답변을 내놨다.
쌀 브랜드 표면에 적힌 양곡표시사항 중 하나인 ‘쌀 등급’을 확인하고 쌀을 구입한다는 구매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쌀을 구입하는데 “등급을 확인하지 않느냐”고 묻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쌀에 등급이 있는 것도, 등급에 따라 품질과 값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것이다. 기자가 양곡표시사항을 보여주며 표시사항에 적힌 쌀 등급을 통해 고품질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이자 “처음 듣는 얘기”라며 시큰둥했다.
◆외면받는 ‘쌀 등급표시’=소비자들에게 정확한 쌀 품질정보를 제공해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생산자의 품질향상을 유도하겠다며 시행 중인 ‘쌀 등급표시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쌀 등급표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비자들은 쌀을 사면서 등급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쌀 유통업체들 사이에선 ‘쌀등급을 표시하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해 등급표시를 꺼리고 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등급표시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양곡표시 이행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쌀 등급표시율은 24.8%에 불과했다. 현재 양곡관리법에서 쌀 등급표시는 ‘특·상·보통’으로 표시하되 표시기준에 미달하는 경우는 ‘등외’로, 품질 등급검사를 하지 않은 경우는 ‘미검사’로 표시하도록 허용하는데 10개 중 8개 가까이가 ‘미검사’로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앞서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수도권에서 판매되는 브랜드쌀 92종의 표시 실태를 조사해 내놓은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와 ‘미검사’ 표시 쌀이 72%에 달했다.
쌀 유통업체들이 등급표시를 꺼리는 이유는 여전히 쌀 등급을 표시해 얻을 수 있는 기대치보다 깐깐한 등급표시 단속에 적발됐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일반업체에 비해 등급표시율이 높은 농협미곡종합처리장(RPC)에서조차도 ‘미검사’ 표시 존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쌀의 경우 유통과정에서 날씨, 보관조건 등에 따른 싸라기 발생이나 수분증발 가능성이 높아 쌀 등급이 달라질 위험성이 커 품질표시 단속에 적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특히 쌀 품질검사 기기마다 분석 결과가 다르게 나오고, 품질분석기 자체의 검정기관이 없어 현장 불신이 큰 것도 ‘미검사’ 표시율을 높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쌀 유통업체 관계자는 “홍보부족 때문인지 쌀 등급표시를 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소비자 반응이 별 차이가 없다”며 “반면 품질표시를 위해서는 수분 등 5개 이상의 항목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다 유통과정에서의 변질 우려가 있어 대부분 가공업체들이 ‘미검사’ 표시를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RPC 관계자는 “등급 검사장비가 워낙 고가인데다 기계마다 측정 오차가 커 등급표시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현장의견 들어 해법 찾아야=정부가 2013년 양곡표시제를 개정하면서 등급표시율 제고를 위해 단순화한 쌀 등급표시가 현장에선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당시 기존 쌀 등급표시제 위반에 대한 제재가 엄격해 양곡유통업체들이 품질등급을 ‘미표시’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5단계 등급을 3단계로 줄였다고 밝혔지만 허언이 돼버렸다.
국회 예산정책처(이하 예정처)까지 나서 쌀 등급표시제 개선을 주문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예정처는 지난 10월 발간한 농업보조사업 평가에서 쌀 등급표시제는 단백질 함량을 낮추기 위해 질소질비료를 적게 주는 농법을 유도하고, RPC는 계약재배 확대로 완전미 생산을 늘려 쌀 개방화에 대비해 고품질 쌀 생산을 확대한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예정처는 그러나 농식품부가 그동안 쌀 등급표시와 관련해 등급구분 확대·완화를 반복하는 등 쌀 등급표시제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예정처는 “농식품부는 농업현장의 의견을 반영하되 고품질쌀 정책을 책임지는 부서로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농협RPC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쌀 등급표시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싸라기 비율 등 지나치게 높은 기준의 선별완화 등이 먼저 필요하고, 현장 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점진적으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검사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검사기기의 검정시스템 확립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성홍기 기자 hgsung@nongmin.com, 사진=김병진 기자 fotokim@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