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만의 개헌 논의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상향식 개헌’을 표방하며 각계 의견 수렴에 나섰고,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도 세미나·토론회를 잇달아 열고 개헌에 불을 지폈다. 당장 15일에는 국회에서 ‘헌법상 농업조항 어떻게 개정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다. 그렇다면 개정 헌법에 농업 관련 조항은 어떻게 반영돼야 할까. 학계·법조계·생산자단체 전문가 12명으로부터 올바른 헌법 개정 방향을 들어봤다.
<현행 헌법 중 농업·농촌 관련 조문>
제121조 ①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 ②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생하는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
제123조 ①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ㆍ육성하기 위하여 농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ㆍ시행하여야 한다. ②국가는 지역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ㆍ육성하여야 한다. ④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⑤국가는 농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제121조(경자유전 원칙)=현행 헌법은 전문과 본문 130개 조문, 그리고 부칙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전체를 농업·농촌에 할애한 조문은 경자유전 원칙을 규정한 제121조뿐이다. 제121조 1항은 경자유전에 맞게 농지 소작제도를 금지하지만, 2항은 농지 임대차나 위탁경영을 통해 경자유전의 예외를 인정한다.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예외조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경자유전 원칙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임대차 현실에 맞게 경자유전 원칙을 삭제하자는 주장이 맞서왔다.
전문가 의견조사에서는 식량주권 유지와 농업의 다원적 가치 보전·계승을 위해 경자유전을 헌법에 남겨둬야 한다는 주장(9명)이 삭제하자는 의견(3명)보다 많았다.
이용기 영남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경자유전이란 원칙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 정도의 농지가 보전되고 한국농업이 유지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 규정이 폐지되면 농지전용과 농지투기가 빈발하면서 한국농업은 빠른 속도로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경자유전 예외조항 중 ‘불가피한 사정’은 매우 모호한 표현으로 임대차가 남용될 수 있는 만큼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재일 명지대 법학과 교수는 진짜 농민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유럽에선 농민이라고 해서 농지에서 맘대로 축사를 짓거나 함부로 나무를 벨 수 없다”며 “농업생산성이라든지 농촌경관과 무관하게 농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자, 즉 농민 자격이나 규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자유전 원칙이 사문화됐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라며 “허점이 많은 농지원부에 의존할 게 아니라 농민 자격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육곤 농협중앙회 미래전략부장은 “전체 국토에서 농경지 비중이 20%에 불과하고 식량안보도 취약한 상황을 고려하면 경자유전은 반드시 유지돼야 할 헌법 조문”이라고 강조했고, 이종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부장은 “경자유전 원칙 포기는 농지 투기를 불러와 농업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경자유전을 헌법에 명시할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임차농지 비중이 50%를 웃도는 상황에서 헌법상의 경자유전 원칙은 큰 의미가 없는 조항”이라며 “실효성이 떨어지는 경자유전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농지전용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특별히 인정할 필요가 있으면 법률에 따라 인정한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헌법 제121조는 시대에 맞지 않고 농업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조항”이라며 “삭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윤배경 법무법인 율현 대표변호사는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해서 생산성을 높일 방법이 있고, 한편으론 (식물공장처럼농지가 아닌) 대도시 건물 내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단이 도입되는 등 농산물 생산 자본이나 농지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며 “게다가 임대차 혹은 위탁경영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굳이 경자유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제123조(국가의 농어업·중소기업 보호·육성 의무)=5개 항으로 이뤄진 현행 헌법 제123조는 국가의 농어업·중소기업 보호·육성 의무를 규정한 조문이다. 이중 2항은 농어업과 연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지역경제를, 3항은 아예 거리가 먼 중소기업만 다루고 있다. 5항 역시 농어업 생산자조직을 다루면서 중소기업을 동일선상에 놓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설문에 응한 전문가 대부분은 중소기업 관련 조항인 3항을 제외하거나 손질할 것을 주문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123조 가운데 유독 3항만 농어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3항을 삭제하거나 다른 조문으로 옮겨 123조 전체를 농어업만 다룬 순수한 조문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민수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실장도 “123조 중 2항과 3항을 별도로 떼어내는 대신 농업의 다양한 가치를 넣자”며 추가 대상으로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수립·집행 근거 ▲농업·농촌 가치를 위한 정부·농민·국민간 상호준수 의무 ▲농업인력 육성정책를 예로 들었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123조 1항 중 국가 의무에 ‘식량안보와 다원적 기능 제고’를 추가하고 , 중소기업을 다룬 3항은 물론 지역경제를 규정한 2항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주문했다. 김정호 경상대 초빙교수 역시 농어업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2항과 3항의 문구를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예컨대 국가의 ‘중소기업 보호·육성 의무’에 ‘농어업 발전을 고려하면서’란 단서를 추가하는 식이다.
농업 관련 조문을 일부 손질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종혁 부장은 농수산물 유통구조 개선을 규정한 4항에 ‘농산물 최저가격보장제’를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이 부장은 “1987년 헌법 개정을 통해 노동자의 최저임금제가 도입됐다”며 “농민 역시 최저가격보장제를 통해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4항의 ‘가격안정’이 자칫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뒤이어 나오는 ‘농어민 이익 보호’를 고려하면 ‘가격안정’을 ‘적정가격’으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육곤 부장은 농가소득의 중요성이 커진 점을 헌법에 반영하자고 제안했다. 김 부장은 “123조 4항의 마지막 문구인 ‘이익 보호’를 ‘소득 보장’으로 바꾸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기타=이용기 교수는 농업 관련 헌법 조문의 전면적인 개정을 주장했다. 그는 “30년 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은 폐쇄경제와 보호주의 농정, 그리고 전통적이면서 좁은 의미의 농업 역할·가치를 규정한 것”이라며 “농업의 역할과 가치가경제적 역할을 넘어 다원적·공익적 역할로 확대되는 점을 반영한 전면적인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명기 연구위원은 “농민이 농지를 이용하면서 공익적 가치를 창출하려면,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경작자에게 공익적 가치를 창출할 책임과 권리를 부여하고, 국가는 (직불제 등) 이에 걸맞은 지원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정호 교수는 통일농업을 고려한 헌법 개정을 주문했다. 그는 “남북간 농업협력을 조직적이면서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헌법에 농업협력의 비전과 중장기 로드맵 마련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상영 기자 supply@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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