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농업과 가치 
어느 대상물에 대한 가치 평가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각자 갖고 있는 인식이나 취향·가치관에 따라 같은 대상을 놓고도 그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 영화 <정사(Intimacy)>나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은 외설 시비가 붙은 대표적 작품이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일부에서는 눈요기 대상으로 치부하지만 평론계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성 정치학을 섬세히 묘사한 수작이라 평가받는다. 그래서 이들 작품들은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엔 <나인송즈(9 songs)>나 <포에트리 브로셀(Poetry Brothel)>이 같은 논란을 제공했다.
음악도 그렇다. 첫선을 보일 당시 엄청난 혹평을 받았지만 지금은 음악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881년 초연됐을 때 “귀에 악취를 풍기는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버나드 쇼로부터 “세상에는 두번 해서 안될 희생이 있다. 그중 하나가 브람스의 ‘레퀴엠’을 듣는 것이다”라는 혹평을 들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도 기괴하고 무미건조하고 조잡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이러한 상반된 의견들을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적 잣대로 평가할 순 없다. 각자의 시각에서 가치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농업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어떨까. 상식선에서 농업이 국민 먹거리의 생산기지를 맡고 있기에 절대적 가치로 평가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개헌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일련의 상황으로 볼 때 이 상식은 무참히 깨진다.
국민 1100만명 이상이 ‘농업가치 헌법반영’에 찬성했지만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절대선이 아닌 상대적 가치에 불과했고, 다른 산업보다 비교열위에 있는 산업이었다. 더이상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도 아니었다.
정치권은 다른 산업과의 형평성 문제를 들어 농업가치를 헌법에 반영하길 주저했다.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 개헌안과 모든 정당의 개헌안에 농업가치가 반영되긴 했지만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후였다.
앞으로는 어떨까. 세계화의 확산과 농산물의 시장개방 확대는 우리 농업과 농업가치를 지금보다 더욱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세태를 탓할 순 없다. 앞서 든 사례와 같이 가치 판단은 주관적이고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농민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깨끗한 농촌을 만들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더욱 높이는 데 농민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농협과 농민단체가 ‘농약 바르게 사용하기 운동’ ‘깨끗하고 아름다운 농촌 가꾸기 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주식투자 기법으로 모멘텀 투자와 가치 투자가 있다. 단기성과를 중시하는 모멘텀 투자와 달리 가치 투자는 기업의 내재가치를 평가한 후 안전마진이 확보된 가격에 사서 적정 가격에 도달하면 매매하는 걸 말한다.
지루한 투자기법이지만 올바르게 실천만 한다면 꽤 높은 투자 성공률을 자랑한다. 그래서 가치 투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법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농업가치도 마찬가지다. 농업가치가 사실상 헌법에 반영된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농업가치를 절대가치로 만들기 위한 농업계의 자발적인 노력과 실천이다.
농업가치를 높이려는 농민들의 노력이 모일 때 농업가치는 좀더 객관화된 가치로 인정받을 것이다.
오영채 (농민신문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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