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형 세계식량 경제에선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 등이
생산·소비 중간지대 장악하고 무역규범·지배시스템도 만들어
이런 문제 직시하고 나라마다 식량주권·자립 운동 강화해야
전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유엔(UN·국제연합) 자문위원이기도 했던 장 지글러 박사의 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탐욕의 시대>는 오늘날 세계의 식량문제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잘 일러준다. 그의 출발점은 이렇다. 왜 세상의 한편에는 비만과 음식물 낭비가 넘쳐나는데, 다른 한편에선 굶주림과 아사가 속출하는가?
사실 오늘날 세상에는 70억 인구의 2배가 넘는 사람들까지 먹여 살릴 식량이 있다. 따라서 이 지구 위에 굶주림(기아)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우선, 분배다. 쉽게 말해 세계의 식량을 골고루 나눌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은 올초 ‘개인의 부와 공공의 안녕(Public Good and Private Wealth)’ 보고서에서 세계의 억만장자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부의 집중도를 심화시킨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2018년 한해 동안 억만장자들의 자산은 9000억달러 증가했고, 매일 25억달러 늘었다. 반면 빈곤층의 자산은 오히려 감소했는데 지난해 전세계 극빈층의 자산은 11% 감소했다.
옥스팜은 “2018년 세계 상위 26명의 부호들은 (지구촌 인구의 절반인) 38억명의 빈곤층이 보유한 자산과 동일한 규모의 자산을 소유했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지구촌 하위 절반의 전 재산과 맞먹는 세계 최상위 부자의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즉 그 수는 약 20년 전만 해도 300명이었으나 10년 전엔 100명 정도로 줄었고, 이제는 25명 수준이다. 전세계적으로도 부익부 빈익빈, 부자 안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이렇게 전세계 차원의 불평등이 너무 심한 나머지 한편에서는 과잉이, 다른 편에서는 기아가 판을 친다. 물론 이는 과거 식민지 시절, 즉 제국주의와 연관이 깊다. 현 상황 역시 그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더이상 과거의 식민지 모습은 없다 할지라도, 이미 그런 구조가 나라마다 굳어졌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지 나라들은 오늘날 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에 몰려 있는데, 이들 나라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농업·공업·서비스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기보다는 제국주의 나라 또는 부자 나라에게 식량이나 원료의 공급처 역할을 지속하도록 구조가 이미 짜여진 상태다. 지금도 열대우림지역에선 부국의 소비자들을 위한 육류·바나나·코코아·커피 등이 대량생산된다. 하지만 정작 그 나라 서민들은 그것을 사 먹기에 너무 가난하고 여유가 없으며, 열대우림은 급속히 파괴된다.
제니퍼 클랩이 지은 <식량의 제국>에는 ‘세계식량체계(Global food system)’라는 용어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가공식품은 생산·가공·유통·판매 등을 포괄하는 일련의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오늘날 더이상 한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 과정엔 국제 정치·경제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한다. 즉 오늘날 산업형 세계식량 경제에서는 초국적기업이나 금융자본 등이 정부나 민간재단과 협력해 세계식량체계의 중간지대(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지대)를 장악하고 이를 위한 국제무역규범(예를 들면 ‘세계무역기구’의 농산물 자유화)과 지배시스템을 만든다.
그 결과 글로벌 식품산업의 등장과 먹거리의 대규모 상품화, 세계 식품시장의 불균형과 변동성 증가, 농산물의 금융상품화로 인한 투기성 경향, 식품가격 상승과 빈부격차의 심화, 산업형 농업의 도입,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을 활용한 대량생산 등이 확산된다. 나아가 이는 종자에서 농약, 비료, 곡물 무역, 식품가공 및 소매업에 이르기까지 세계식량체계의 전 과정을 장악하는 초국적 농식품기업의 집중화와 계열화(식량제국의 탄생)를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나라마다 식량주권 및 식량자립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 또 ‘식량의 제국’ 해체를 위한 범지구적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농업·농민·농사·농촌을 중시하는 새로운 정치·경제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