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홀대’ 필리핀, 세계 식량난 때마다 ‘보릿고개 공포’ 기본을 버린 해외사례 농지에 골프장·공장 건설 돈벌이 쉬운 관광업 육성 쌀 수출국서 수입국 전락 2008년 쌀 파동 직격탄 올해 코로나19로 또 긴장
“이제부터 식당에서 파는 쌀밥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겠습니다.”
국제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2008년, 필리핀 정부는 국민 주식인 쌀을 확보하고자 이같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식당에서 쌀을 주원료로 한 음식을 팔 때 ‘반(半)인분’만 판매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2008년 당시 세계적인 쌀 파동에 여러 나라가 몸살을 앓았는데, 그중에서도 필리핀은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 쌀값이 1t당 300달러에서 1300달러까지 껑충 뛰자 쌀 수출국들은 식량안보를 이유로 곳간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비축했다. 세계 최대 쌀 수입국인 필리핀은 웃돈을 주고도 물량을 확보하지 못했고, 자국민에게 필요한 쌀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당시 필리핀 농업부 장관은 “1인분이 아니라 절반만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해 거센 반발을 샀고, 쌀을 구하지 못한 시민들은 정권 퇴진 운동까지 나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며 지구촌 식량위기가 우려되는 현재, 필리핀은 또다시 긴장하고 있다.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쌀 수급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베트남이 코로나19 사태로 쌀 수출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됐다. 다행히 베트남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출을 재개하면서 급한 불은 끈 상황이지만 불씨는 남아 있다.
김종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관측팀장은 “필리핀의 연간 쌀 수입량은 자국 생산량의 15%에 육박할 정도로 수입에 의존하는 비율이 낮지 않다”면서 “쌀 수입량의 70% 이상을 베트남에 의존하는 점도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필리핀이 처음부터 식량안보가 취약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은 1960년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농업연구소인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세우고 아시아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우리나라 식량자급의 발판을 마련한 <통일벼>도 고(故) 허문회 서울대학교 교수가 IRRI에서 근무하는 동안 개발한 것이다. 농업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와 쌀 재배에 적합한 기후조건까지 더해져 필리핀은 그야말로 풍요의 땅이었다. 한때는 남아도는 쌀을 수출까지 했다. 그랬던 필리핀이 이젠 쌀을 팔아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수입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식량안보를 책임지는 농사 대신 쉽고 벌이가 좋은 관광서비스업으로 눈을 돌렸다. 1990년대 국제 쌀값이 1t당 200달러선에서 안정세를 보이자 필리핀 정부는 농업에 대한 투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부족한 식량은 수입한다’면서 산업화에 몰두하고 관광업을 육성했다. 1년에 3모작·4모작이 가능하던 기름진 농토에는 골프장과 공장이 들어섰다. 해외여행의 시대가 열리면서 관광서비스업으로 눈길을 돌리는 농민이 늘었고, 농지는 더욱 황폐화됐다. 스스로 풍요의 땅을 저버린 결과다.
일반적으로 식량은 그 특성상 소비를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재고 유지에도 엄청난 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싸다고 무조건 쟁여놓을 수도 없다. 독과점 형태의 국제 곡물시장 구조에서 수출국이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수입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할지 다시 한번 돌이켜볼 때다.
함규원 기자 one@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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