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개 든 '자원 버블' 공포] 세계 휩쓴 대가뭄…식량 폭동 조짐도
재앙이 다가온다. 전쟁보다 무서운 최악의 식량 위기(food crisis)다.”(세계식량계획·WFP)
우려가 과연 현실이 될 것인가. 2011년 새해 벽두부터 ‘식량 대란’ 경고음이 켜진다. 무엇보다 농산물 가격 폭등세가 심상치 않다. 밀·콩·옥수수 등 주요 곡물은 물론 육류와 기호식품 등 거의 대부분의 식품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상태다.
국제식품가격지수는 농산물발(發) 인플레이션인 ‘애그플레이션(agflation)’에 휩싸였던 2008년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러시아와 중국 등은 수입을 늘리고 수출을 줄이거나 금지하는 등 전략적 식량 확보 모드에 일찌감치 돌입했다. 지구촌 곳곳에선 식량을 둘러싼 갈등도 터져 나오고 있다.
전방위적 폭등세…“안 오른 게 없다”
땅에서 나는 거의 모든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있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밀·옥수수·콩 등 곡물가 폭등세가 두드러진다. 밀 가격은 올 들어 부셸당 9달러 근처까지 치고 올라왔다.
지난해보다 84% 오른 수준이다. 식량과 에너지원(에탄올)으로 동시에 쓰이는 옥수수는 이보다 더 높은 95%의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콩도 지난 1년간 57% 오른데 이어 올 들어서도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주로 소비되는 쌀 역시 29개월 내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곡물뿐만 아니라 기호식품도 초강세다. 커피와 오렌지 주스 국제 가격은 1년 전에 비해 각각 89%, 24% 상승했다. 설탕(원당)과 초콜릿 원료인 코코아는 사상 최고치로 오른 상태다.
경기 침체에 물가 폭등까지 덮친 서민 경제는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다. 벌써 지구촌 곳곳에 2008년의 식량 폭동이 재연될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알제리에서는 올 초 이미 식량 가격 폭등에 항의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해 3명이 사망했다.
23년간 장기 집권한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시민혁명에 의해 축출된 것이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이집트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도 폭등한 식품 가격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브뤼노 르 메르 프랑스 농업장관은 “각국 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지 않으면 올해는 2008년보다 강력한 식량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전 세계 식량 생산능력은 지구촌 인구의 3배를 먹이고도 남는 수준이라는 게 FAO의 분석이다. 그동안 진화한 식량 증산 기술 덕분이다.
문제는 필요한 물량이 제때, 정확한 수요자에게 공급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선 이상기후가 가장 큰 원인이다. 갈수록 극성을 부리면서 수확량을 줄이는 것은 물론 경작지까지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과 옥수수 주산지인 미국·러시아·중국 등이 가뭄으로 타들어가고 있다. 콩과 옥수수 주산지인 아르헨티나 등 남미 지역 역시 가뭄 피해가 심각하다. 반면 밀과 사탕수수 재배지가 몰려 있는 호주 동부 퀸스랜드 지역은 60년 만의 대홍수와 사이클론까지 겹쳐 초토화됐다.
스티브 니콜슨 미국 IFP농산물유통의 전략분석담당은 “강수량이 크게 부족해 올해 남미 지역 콩과 옥수수 생산이 각각 15%, 10%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농무부 역시 올해 추수 전까지 전 세계 전체 곡물 공급량이 2.2%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곡물 재고도 5~20% 정도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파업 도미노까지 겹쳤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2월 초부터 월급을 최소 5000페소(1250달러)로 인상해 달라며 파업에 들어간 아르헨티나 부두 노동자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역 작업을 무기한 중단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아르헨티나는 옥수수(세계 2위)와 콩(세계 3위) 밀(세계 4위) 수출 규모가 큰 세계적인 농산물 강국이다.
‘미친 날씨’에 속수무책
공급 부족 전망은 투기 수요의 폭발을 부추기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 1월 25일 곡물의 비상업용 순매수 포지션은 3만5000건으로 집계돼 2007년 8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비상업용 순매수 포지션의 수치가 크다는 것은 헤지 펀드 등 투기성 자금의 유입이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수급 불안을 틈타 가격 추가 상승을 노린 중간 유통상의 사재기도 가격 폭등의 또 다른 축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민혁명을 목도하고 있는 정치권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가 차원의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진다. 민심 수습을 위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알제리는 지난 1월 말 비밀리에 60만 톤의 밀을 사들인 것을 포함해 올 들어서만 모두 170만 톤의 밀을 인근 국가에서 사들였다.
평균 500만~550만 톤 규모인 연간 수입량의 30%를 한 달 만에 채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도 “올해 밀 수입량을 지난해의 두 배로 늘리겠다”고 같은 날 발표했다. 세계적인 쌀 수입국인 방글라데시도 지난 1월 27일 곡물 수입 목표를 120만 톤으로 늘려 잡았다고 밝혔다.
당초 계획인 60만 톤의 두 배 규모다. 바드룰 하산 정부식량감독청의 구매담당 국장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사재기 수요 때문에 (수입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FT는 “튀니지나 이집트처럼 정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식량 빈국들의 정권에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농산물 가격 향배를 결정할 가장 큰 변수는 이상기후의 지속 여부다. 현재로선 비관적 전망이 주를 이룬다. 올해가 사상 최악의 ‘라니냐’가 발생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라니냐는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낮은 날이 5개월 이상 지속되는 이상기후 현상이다.
유엔 기상기구는 “올해는 라니냐 강도가 40년 만의 최고 강도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니냐의 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남방진동지수(Southern Oscillation Index)’가 올 들어 당시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전 세계 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식량위기를 겪었다.
애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쪽은 그 근거로 지구촌 전체의 총수요 증가를 꼽는다. 중산층이 빠르게 늘고 있는 중국·인도·브라질·러시아 등 신흥국들의 소비 증가세가 본궤도에 올랐다는 것이다. 소득이 늘면 대개 육류를 통한 단백질 소비량이 동반 상승하게 된다.
블룸버그통신은 “늘어난 신흥국 수요 증가에 맞춰 경작지 구조조정이 완료되고 기후가 정상화될 때까지는 농산물 가격 상승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며 “최소 2, 3년간 강세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폭락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최근 들어 급등한 농산물 가격에는 심각한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거품의 배경에 2008년 이후 지속된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과 통화량 증가 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잇따른 양적 완화 조치 이후 농산물 펀드 등을 통해 원자재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천문학적 자금이 다시 금융시장으로 되돌아갈 때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관우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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